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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전문대학원 생활수기 공모전 당선작 공개

관리자 2022-12-26 18:04:31 조회수 1,132
대상(황현민 변호사)

1. 들어가며
늘 멋진 합격수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공무원을 꿈꾸며 법학과에 들어왔다가, 다들 도전하는 시험이라기에 사법시험을 기웃거리기 시작할 무렵, 도서관에 있는 오래된 고시잡지에서 가슴 뛰며 읽었던 수많은 합격 수기들... ‘언젠가는 나도 이런 합격 수기를 쓸 날이 오겠지’하고 기대하던 날들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시간에 쫓기고 생활에 치이면서 그런 꿈을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단톡방에 올라온 공고를 보고 다시 가슴이 뛰어버렸습니다. ‘나도 합격 수기를 써야겠다!’ 하지만 특별히 정리를 잘하거나 메모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수험생활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전혀 없고, 변호사가 된 지 어느덧 10년. 로스쿨 3년을 더하면 저의 수험생활은 이미 저의 기억 속에서 “뿌듯함”이라는 필터를 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수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기록으로 남기는 일조차 요원해지겠다는 생각에, 설렘 가득했던 로스쿨 ‘생활 수기’에 도전해봅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1기로 졸업한 황현민 변호사라고 합니다. 남들과 다른 저만의 공부비법이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로스쿨에서 2명의 아이를 출산하며 좌충우돌했던 저의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2. 로스쿨 준비
저는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약 4년간 사법시험 준비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가정형편 상 고시 공부를 계속 하기 어려워 공공기관에 취직하여 약 4년간 근무를 하였고, 결혼 후 첫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에 법학적성시험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영어시험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자기계발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준비를 하지는 않았고, 법학능력시험은 학원의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학원 모의고사와 psat 기출문제를 푸는 것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제일 처음 보았던 모의고사 점수와 약 1년 정도 준비하여 치른 법학능력시험의 점수가 같아서 좌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법학능력시험은 단기간에 많은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시험은 아닌가 봅니다.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LEET 성적표를 들고 로스쿨 원서를 쓰면서 둘째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에 입학 자체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다음 입시에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떨어질 각오로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그래도 천사 같은 둘째 아이가 찾아왔으니 영 소득이 없었던 시간은 아니라며 스스로 위로하던 중에 부산대학교의 추가합격 통보를 받아 들고 양가 어른들에게 합격 소식과 둘째 소식을 함께 전했습니다. 어른들은 ‘임신한 몸으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하셨지만, 든든한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왠지 모를 자신감과 설레임을 안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신입생 준비과정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때는 입덧도 줄어들어서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3. 로스쿨 생활
다시 대학교의 신입생이 된 것 같은 설레는 기분으로 시작한 1학년 1학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기말고사가 끝난 바로 다음날 둘째를 출산하였습니다. 원래 예정일보다 3주 이른 출산이었지만 인큐베이터에 들어 갈 필요가 없을 만큼 아이가 잘 자라 주었기 때문에 저는 여름방학 내내 모유 수유를 하고 몸조리도 충분히 한 후에 2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뜻 아이들 양육을 맡아주신 친정부모님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주중에는 학교 수업과 과제 등을 충실히 하고,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까지는 아이들과 최선을 다하여 시간을 보냈습니다. 공부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한정되어 있다 보니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학 때는 인터넷 강의를 활용하여 다음 학기 수업을 예습하였습니다.
순조롭게 1학년이 마무리 되고 2학년이 되어 1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습니다. 원래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건강 체질이라 여간해서는 피곤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데, 왠지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는 내내 몸이 무거웠습니다.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약을 먹으면 잠이 올 것이 뻔해서 중간고사 시험 동안은 약을 먹지 않고 버텼고, 마지막 시험을 다 치르고 감기약을 챙겨 먹고 한숨 자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임신테스트기를 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상치 못했던 셋째 아이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을 시작으로 일주일 동안 ‘나는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은 언제나 저의 든든한 응원군인 친정 엄마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엄마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복덩이가 찾아 왔구나, 엄마가 키워줄테니 하나도 걱정하지 말아라. 아이들은 다 먹을 복을 가지고 태어나니깐 너는 아이도 낳고 시험도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댁에서도 제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기제사며 묘사, 명절 등 모든 집안 행사에 ‘열외’를 인정해주셨습니다(저의 시댁은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의 종가이고, 저는 맏며느리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셋째를 가진 이후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남편의 육아 내공이 만렙(?)에 가까워진 것도 크게 한몫을 하였구요.
저는 주말에는 육아에 전념하여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인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까지는 최대한 충실히 공부하려고 노력하였고, 전문분야를 특화시키는 공부보다는 변호사시험 준비에 도움이 되는 과목 위주로 수강을 하여 학교 수업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험준비를 하였습니다. 방학 때는 인터넷 강의를 이용해서 다음 학기 수업에 필요한 과목을 예습하고, 교수님들의 특강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를 하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나 전문분야에 관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항상 아쉽고 후회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세 아이의 엄마’라는 제가 처한 상황과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최소한의 목표에만 집중하여 다른 활동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교 공부에만 집중한 끝에 무사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부산고등법원의 재판연구원으로 법조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4. 학라밸(?)을 고민하는 학우들에 대한 제언
로스쿨에서 학업과 육아의 균형 이른바 ‘학라밸’에 대해서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고민은 비단 로스쿨 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출산과 육아, 일의 우선순위 등은 개인의 건강과 주변 여건, 가치관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사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신체적인 거부감이 크지 않았고, 육아를 기꺼이 도와주신 부모님들이 계셨으며, 민폐 육아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뻔뻔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처럼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제가 생각하고 결정했던 방법들을 참고해보신다면 조금은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변호사로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더군요. 비록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의 예쁜 시절을 눈에 많이 담아두지는 못하였지만, 아이들은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하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두운 터널도 언젠가는 끝이 있고, 지금 이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낸 가족들과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보답하는 일은 내가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이웃들에게 따뜻함을 베푸는 변호사로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터널을 달려 왔습니다. 도종환 님의 시처럼 이 세상 어떠한 아름다운 꽃들도 흔들리면서 피어나니까요. 여러분께서도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지금 곁에 있는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우수상(함종민 변호사)

수학여행을 시작하는, 곧 법학왕이 되실 분들을 응원하며.


11회 함종민


I. 시작하는 글.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이번에 강원대학교에 지원한..”
2018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회사의 빈 회의실에서 박종희 선생님께 입시 관련 전화를 드렸던 날을 기억합니다. 입시가 한창이라 바쁘실 것이 분명했음에도, 굉장히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포근한 회사 화장실에서 합격을 확인하고 감사의 스윙댄스를 추었던 날 또한 기억합니다. 청소해주시는 어머님과 조우할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많은 행운이 불어왔던 가을이었습니다.
참 운이 좋았던 그 화장실 댄서 아저씨는, 춘천에서 세 번의 봄을 만나는 동안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종종 철없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 생각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치열해진 입시를 뚫고 오신 14기 분들의 행복한 학교생활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소박한 글로 옮겨 보려 합니다.


II. 세 가지 행복 ♣

1. 학업에 관하여

가.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 가장 멀리 가는 방법.’

저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명백히 아닙니다. 1학년 1학기 기말시험을 마치며, ‘유레카.. 이번 학기를 통해 시험을 잘 보는 포인트를 깨닫고야 말았다. 이제 정말 누구도 나를 말릴 수 없어.’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학기가 되면 누구나 저를 손쉽게 말리곤 했고, 이러한 경험을 딱 여섯 차례 반복했습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즐겁게 했습니다. 학업이 즐거웠던 건, 저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2학년 여름방학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두꺼운 기본서를 보며 강의를 듣기도 하고, 요약된 암기장을 보기도 하고, 객관식 문제집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라는 사람은 사례집을 볼 때 가장 재미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되었고, 모든 과목을 사례집 위주로 공부하였습니다. 주위 친구들과는 달리, 1학년 겨울방학 이후 변호사시험을 칠 때까지, 최신판례 강의를 제외한 어떠한 인터넷 강의도 듣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의를 들으면 금방 지치는 타입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공부 방식이 사실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라, 추천해 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저는 ‘가장 재미있는 길이 가장 오래 갈 수 있는 길’ 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제 방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마흔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마흔 가지의 디테일과 그에 맞는 답이 있을 것입니다. 같은 법조항도 사실관계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듯, 남들이 선호하는 방법이라고 하여, 나에게도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찾으신 다음,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나.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독서하러 갈까.’

학업의 재미를 유지하기 위한, 소소한 습관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공부’ 라는 단어에는 시험을 연상시키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가벼운 ‘독서’ 라는 단어로 치환해 주었습니다. ‘공부 계획’ 대신 ‘독서 계획’ 을 짰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속으로, ‘공부하러 가야지.’ 대신 ‘독서하러 가야지.’ 라고 되뇌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의 영향인지, 열람실에 나가는 것이 싫다고 느껴진 적은 다행히도 없었습니다.

다. ‘법학 시험은, 글쓰기 놀이.’

저의 학업이 즐거웠던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를 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과분한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온 건,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가며, 어렸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한국어의 풍성한 표현들이 좋아졌습니다. 수없는 야근 끝에 한글을 선물해 주신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조선 로클럭 분들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례형과 기록형 답안을 쓰는 일이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다소 딱딱한 형식을 요구하더라도 그 또한 글쓰기이고, 현업에 계신 분들과는 달리, 제가 법적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법조인의 길을 가기로 한 이상, 글이란 배우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이혼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배우자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기에 항상 예뻐 보이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고심 끝에 택한 배우자라면, 이번 생은 함께 할 운명이라 생각하고 장점만 보는 것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노부부가 될 때까지 함께 하려면, 장점만 있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장점만 보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취미에 관하여

가. ‘휴식 없이는 法크업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분명 입학 전, ‘나는 이제부터 인간이 아니다.. 전류 대신 밥을 먹는 공부 기계일 뿐이다. 띠릿띠릿’ 하고 법학전사의 결의를 다지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법학 알파고라 하더라도 과열되면 연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거기서 더 무리하다가는 막대한 수리비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취미를 가지는 건 학업의 호흡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헬스에서도 소위 말하는 벌크업을 위해서는, 운동만큼 영양 섭취와 휴식이 중요하듯이 말입니다.
저는 1학년 때 원우들과 ‘Go in 물’ 이라는 수영 동아리 활동을 하였으나, 곧 코로나의 화마로 인하여 수영장을 이용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마음만큼은 효자동 박태환 이었기에, 운동장 옆 연적지에라도 수영복을 입고 뛰어들고 싶었지만, 어렵사리 인가된 강원대 로스쿨을 존폐 위기로 몰아넣고 싶지 않아 다른 취미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나. ‘빠르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니까.’

그래서 찾은 취미는 피아노였습니다. 저는 억지로 체르니 100번을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 서양 음악에 대한 민족적 반발감으로 학원을 탈주하다 발각된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그 이후 피아노와는, 연락은 않지만 잊기엔 아쉬운 헤어진 연인 같은 사이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20년 만에 다시 만난 피아노는 마침내, 제 로스쿨 생활에 너무나 크고 고마운 존재가 되어 주었습니다.
피아노를 통해, 음악이든 법학이든 완벽하게 연주하려 욕심을 내면 즐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음악이든 법학이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서, 조금만 연습을 놓으면 거짓말처럼 잊게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고 슬퍼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이, 그냥 다시 연습하다보면 기억이 손끝으로 돌아온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큰 배움은, 음악이든 삶이든 소리가 크다고, 혹은 빠르다고 해서 좋은 연주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수험의 오르막길을 함께 걸어갈 좋은 취미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취미가, 로스쿨 3년뿐만 아니라 훗날 현업에서 업무의 무게에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지실 때, 행복은 변호사 자격증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소리쳐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사람에 관하여

가. ‘강원대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리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상호작용을 하다 보면, 감정에 침전물도 생기기도 하고 생채기가 나기도 합니다. 이는 친구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연인관계에서도, 그리고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3년 동안 매일 만나 같은 과목의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파열음이 발생하지 않을 확률은, 3년 안에 저에게 프로젝트형 아이돌 멤버 합류 제안이 올 확률과 아마 대단한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이 강원대 로스쿨에 입학하신 건 커다란 행운입니다.
인간관계 트러블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학점경쟁에서 파생되는 스터디구성, 족보 공유 등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공직을 지망하시는 분을 제외한다면, 우리 강원대 로스쿨은 학점이 졸업 후 진로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을 편안히 가지신다면, 학점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한결 자유로우실 수 있습니다.
저는 2학년 때 주요 과목의 기말고사에서, 귀마개를 끼고 가장 뒤쪽에 앉았다가 시험 종료 선언을 듣지 못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종료 선언을 하신 이후에도 펜을 놓지 않았으므로, 점수에서 10점이 감점되고 말았습니다. 문제 하나에 일희일비하던 어린 시절의 저였다면, 패닉에 빠져 강원대의 상징 곰두리처럼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학점에 대한 욕심을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처참한 학점을 마주하고도 “와우, 변시에서 이랬으면 몹시 곤란했겠는데.. 미리 배웠으니 잘됐네, 잘됐어 하하” 하고 웃어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Law징어 게임에서 패배한 아재의 비겁한 정신승리’ 라고 준엄히 꾸짖으신다면, ‘쟁점 보는 안목이 정말로 탁월하시다.’ 라는 말씀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 ‘충분히 져도, 큰 일 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마찰열은 학업 외의 부분에서도 발생합니다. 공동생활 공간의 소음이나 사용시간은 물론, 외모 품평이나 사생활 험담 등도 종종 문제가 됩니다. 이런 일들이 온다면 저는 가급적, ‘내가 졌다.’ 라고 속으로 되뇌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어려서부터 경쟁에서 승리해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사소한 것이라도 패배를 인정하면 자존감이 흔들릴 것이라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싸움도, 심지어는 변호사시험조차도, 진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지는 않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내가 졌다.’ 고 말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다소 편안해지고 말이 부드럽게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분쟁이 메시지 자체보다는, 그 표현 방식의 질감에서 발생하고는 합니다. 씨익 웃으며 내가 졌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은, 분노를 녹이는 동시에 되려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여 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쇼미더검클!” 을 외치며 서로를 향한 치킨 게임을 하기보다는, 스프링 변시 파이터가 되어 서로의 안무를 공유하고, 치킨 맥주를 나누실 것이라 믿습니다. 변호사시험의 마지막 날까지 마흔 명의 동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법학답안지 위에서 즐겁게 글의 춤을 추셨으면 좋겠습니다.


III. 마치는 글.

많은 선배님들께서 입을 모아 말씀하시는 것처럼, 법조인의 일이란 그 두꺼웠던 민법 교과서보다도 더 무거운 것 같습니다.
늘 누군가의 분노와 눈물이 묻은 목소리를 마주하고, 그 아픔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밤새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저처럼 방금 닻을 올린 선원에게도, ‘변호사님’ 이라 불러주시며 과분한 존중을 보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7법뿐만 아니라, 웃으며 공부하는 법, 그리고 행복을 유예하지 않는 법까지 놓치지 않고 수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행복이 어쩌면 ‘비가 그치고 햇살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비를 샴페인이라 여기고 그 속에서 춤추는 것’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은 명사가 아닌 동사에 가까운 모습이기에,
제가 변호사라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여행의 행복은 목적지에서 바라보는 풍경보다, 여행을 준비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조금 천천히 걷더라도, 언젠가 분명 법조인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행복하게 책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캠퍼스에 흐드러지게 핀 세잎클로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윤종신 님의 가사를 잠시 빌려서, 수험의 오르막길이 때로는 가파르더라도, 여러분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으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맞이하실 봄내골에서의 시간들이, 부디 귀양이 아닌 휴양이기를, 감금기가 아닌 황금기이기를 바라겠습니다.
여러분들의 3년이 저의 3년처럼, 되도록 그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S.
지난 3년간 제가 편안히 책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박종희 선생님, 유혁기 선생님, 차화영 선생님을 비롯한 강원대 행정실 분들과, 부족한 저를 지도해주시고 어깨를 토닥여주신 교수님들, 푸르고 따뜻했던 11기 동기들과 강원대 선·후배님들, 그리고 새벽부터 열람실을 깨끗이 청소해주신 어머님들과, 늘 친절하셨던 법학도서관의 사서 분들께 이 공간을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우수상(이순희 변호사)

<뜨겁게 나를 만났던 시간>


저는 학부시절 법학을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로스쿨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리트준비의 경우 기출문제 위주로 스터디를 하며 준비를 했는데, 리트 준비 보다 제가 로스쿨 입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면접과 자기소개서였습니다. ‘성장배경-지원동기-장,단점-입학 후 진로’ 이렇게 크게 4가지의 질문 앞에서 당시 저는 지난 25년간 저의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왜 로스쿨에 입학하고 싶은지, 나라는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나는 로스쿨에 입학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보며 나도 잊고 살았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모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남들이 보기에 무난하게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그 속에서도 ‘나’를 제대로 만난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장배경/지원동기/장단점/향후 진로’ 이 4가지 질문 앞에서 지금까지 저의 인생을 다시 반추해볼 수 있었고, 지난 25년간 제 인생에 있었던 희노애락의 순간들을 다시금 밟아가며 지금까지의 저를 있게 했던 많은 사람들, 상황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쿨에 입학한 후 학업을 이어가며 저는 더욱 뜨겁게 ‘나’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저의 느낌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하면 바로 ‘고독’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 먹어도 다시 도서관 내 자리에 돌아와 그날 해야 할 공부와 마주해야했던건 ‘나 혼자’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할 공부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이것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학습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공부는 참으로 ‘고독’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로스쿨 3년간 책상에 앉아 책과 나와의 고독한 시간들을 쌓아갔습니다. 공부가 잘 될 때면 그 누구보다 ‘나’를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었고, 공부가 잘 되지 않고 슬럼프가 올 때면 책상에 앉고 싶지 않은 ‘나’를 다독이고 누구보다 따뜻하게 달래주어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나’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주어야 했고, 매번 다가오는 시험이 무섭고 두려운 ‘나’에게 도망쳐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이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의 어두운 모습, 우울한 모습, 약한 모습을 마주해야했고 그럼에도 “나는 절대로 너를 포기 하지 않을거고, 슬프게 두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너를 혼자 버려두고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나 자신을 붙잡았습니다. 나보다 똑똑하고 뭐든 잘 해내는 로스쿨 원우들을 보며 한없이 작아질 때가 많았지만 그럴때면 ‘모르는 건 배우면 된다. 누구나 다 각자의 때가 있고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나를 위로하며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때로는 ‘나’에게 가장 엄격한 선생님이어야 했고, 때로는 ‘나’에게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창 밖은 봄-여름-가을-겨울이 3번 지나갔고 변호사시험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로스쿨 학업 가운데 너무도 좋은 원우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제 자신’을 뜨겁게 만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SNS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내 안에 ‘나’의 소리는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두려워하는지 등등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때가 많은데, 로스쿨을 준비하면서 또 로스쿨 학업 가운데 그 누구보다 ‘나’를 뜨겁게 만나고 위로하고 껴안아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살아가는 저는 사회인으로서 많은 도전과 시련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더 큰 문제가 제 앞에 놓일 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보다 ‘제 자신’을 잘 알고 ‘제 자신’을 데리고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시련들도 이겨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힘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면 되고 그렇게 다시 힘을 내어 제 자신에게 기회를 준다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란 없다는 것을 로스쿨 학업을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줄 ‘용기’를 배웠던, 누구보다 뜨거웠던 지난 3년간의 로스쿨 생활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 곁에 있어주었던 많은 원우들과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 글을 읽고 계실 누군가에게도 제가 몸으로 배우고 느낀 그 ‘용기’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우수상(이은빈 변호사)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수기 공모전

30대 중반 아줌마의 로스쿨 생존 공부법

이은빈 변호사(변시 9회)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안정적으로 꽤 오래 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입시요강을 검색해보니 법학적성시험(LEET)은 얼핏 수능 언어영역과 비슷한 느낌이고, 절대적인 공부량을 확인하는 시험이 아니어서 일을 계속하면서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정도로 대비했고, 풍부한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공들여 쓰는데 집중한 결과 무난히 면접을 본 뒤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입학 한 달 전까지 출근하고, 퇴사와 거의 동시에 결혼하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오느라 선행학습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첫 학기는 그야말로 ‘멘붕’이었습니다. 중간고사 전날, 민법 교내 기출문제를 보고 도무지 어떻게 답안을 작성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백지 낼까 전전긍긍하며 절망적으로 시험장에 들어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기말고사 때는 좀 더 나은 답안을 썼고, 다음 학기는 그보다 더 나은, 법학에 알맞은 답안 작성법을 그렇게 서서히 익혔던 것 같습니다.

로스쿨 3년 과정은 2학년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크게 달라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갑작스레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어 출산 및 육아를 하고 2학기에 복학하기도 했지만, 2학년 2학기부터는 변시 대부분의 기초과목을 이미 수강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전 범위 사례형 문제라든가, 변시 기출문제를 스터디를 짜서 시간 안에 풀어보는 연습 등의 집중적인 연마가 필요한 단계입니다. 전 범위로 출제되는 사례형 답안을 쓸 자신이 없으면 없을수록 연습과목을 수강해서 교내 시험을 통해 직접 부딪혀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로3을 시작할 때는 그저 3학년이라는 신분만으로도 뭔가 압박이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3학년 1학기는 여느 학기와 같이 학사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게 지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민사재판실무를 들을지 말지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중 변시에서 출제되는 민사집행법 관련 문제를 대비하는데 민재실을 듣는 것이 유리하다는 조언을 듣고 수강했고, 결론적으로 3년 과정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법 기초를 다지는데 그만한 수업이 없었습니다. 최신판례를 포함해서 주요 판례를 매시간 정리해주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제 손으로 요약해서 써보는 동안 민법 실력이 안정적으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변시 끝나고 거의 모든 책을 미련 없이 버렸지만 제 손과 땀이 스민 민재실 교재는 이사 갈 때도 가지고 올 정도였습니다.

본격적인 변시 준비는 6모 이후부터 시작했습니다. 6모 전까지는 학교 수업을 듣느라 체계적으로 정리된 과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수업 들으면서 정리한 민재실 교재나 공법기록 수업에서 써본 기억 하나하나가 변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됐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6모 끝나고 체력적으로 너무 지쳤고, 쌍둥이 육아에도 신경을 써야 했던 터라 8모 전까지 공부시간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척추측만증이 심한 편인데 장시간 시험을 보니 무리가 와서 2주 정도 한의원 침 치료를 받았지만 크게 효과는 보지 못했고, 파스향이 나는 독일산 연고를 바르고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공부시간을 줄이니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호전되었습니다.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빠른 동물이라, 그렇게 쓰러질 것 같이 힘들었던 공법 첫날의 기억도,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머리가 하얘졌던 민사법 사례형 시간도 8모, 10모까지 진심을 다해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나아집니다. 체력적으로도 적응이 되고, 스톱워치를 켜두고 시간 안에 답안을 어떻게든 채우는 연습을 하면 답안 작성 측면으로도 적응이 됩니다. 저는 6모 때 형사법 기록형 시간을 앞두고 척추측만증 때문에 등이 너무 아파서 중간에 1시간 쉬는 시간에도 여학생휴게실에 가서 누워 있다가 겨우 시험장에 돌아와 응시했을 정도로 힘겹게 시험을 치렀습니다. 막상 변시는 중간중간 원우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가볍게(!) 칠 수 있었습니다.

겨울방학 기간 아기들 돌잔치를 하면서 로3을 맞이하였고, 결혼하면서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많이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로스쿨에서 가까운 교직원 식당의 5,000원 하는 백반도 부담스러워서 서문까지 15분 정도를 걸어 1,500원에 떡볶이 한 접시를 혼자 사먹고 들어오거나 도시락 가게의 저렴한 메뉴를 고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형편상 재시는 꿈도 꿀 수 없었음에도, 가족들과 주거공간을 같이하였기 때문에, 또 쌍둥이 양육 특성상 공부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어서 공부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아기들이 걷고 뛰기 시작하면서 남편 혼자 아기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이 위험해서 주말 중 하루, 평일 중 하루 3시간 정도는 유아친화시설이 있는 인근 백화점 등으로 가족 나들이를 나가고, 변시 보름 전까지도 예방접종 등의 가족 외출로 상당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3학년 여름방학 때에도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어진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단단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원칙은 단순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일 아침 8시 출석 스터디는 꼬박꼬박 나가고, 일주일 2~3회 성실한 동생들과 하는 사례기록 스터디는 빠지지 말기. 선택법을 포함해서 법전협 모의고사 3번은 진심을 다해 전과목 응시하기. 변시 대비로 교내에서 열리는 특강과 정규 수업시간은 고도로 집중해서 들었고, 수업과 특강 따라가기에도 벅찬 만큼 인터넷 강의나 사교육에의 의존은 최소화하였습니다.

선택법은 일찌감치 국제거래법으로 정해서 2학년 2학기부터 교내 전담 교수님의 정규 교육과정(국제사법-국제거래법-국제거래법 연습)을 충실히 따라가니 변시 앞두고 따로 준비할 것이 없어서 부담을 덜었습니다. 순공시간을 엄격히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하루 대략 6~7시간 정도, 많으면 8시간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저녁시간이면 아기들을 보러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 많아서, 일주일에 하루이틀 정도는 여학생휴게실에서 자면서 부족한 공부시간을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내신은 중간을 조금 웃도는 위치였지만 최종 10모에서는 전체석차 상위 10% 안에 들 정도로 놀라운 성적 상승을 경험했습니다.

본 시험장에서는 모고 때의 충분한 연습을 거쳐 자기만의 스톱워치를 켜놓고, 거기에 맞춰 리듬을 타고 누락 없이 답안을 완성해야 합니다. 보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지는 문제가 나왔다고 해도 비슷한 법조문이라도 쓰고 글짓기를 해서라도 통백 없이 지나가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기들에게 감기를 옮아 12월에만 2~3번 심한 감기기운이 있는 채로, 변시 직전 주까지 컨디션이 무척 좋지 않아서 거의 평소 실력으로 본다고 생각하고 응시했습니다. 변시기간 5일 내내 무리하지 않고 밤 12시면 집에 들어가서 자는 아기들 기저귀를 확인하고 잠이 들었고, 7시쯤 일어나 실전에서도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했지만 이미 모고 3회를 거쳐 검증된 스스로의 실력과 끈기를 믿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는 것도 로스쿨에서 누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연하게 공부하면 떨어진다” “공부할 때는 이 세상에 법학책이랑 나 둘만 있다고 생각해라” 교수님이 해주시는 말씀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시 사회로 나와서 근무시간 틈틈이 두서없이 적어본 제 생활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저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던 사람도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지만 결코, 끝까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시험이라는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수상(김정범 변호사)

어느 사이버대학 출신자의 법전원 생활 수기

1. 자기소개
저는 전북 전주시 소재 법무법인 백제 소속 변호사 김정범이라고 합니다. 전북대 로스쿨 9기로 입학하여 10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재시 합격 수기는 다음 카페 애프터로스쿨에 게시하였습니다).

2. 군 복무 중 학점은행제 경영학사 취득
저는 서경대학교 법학과 2학년 수료 후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기 위해 자퇴를 하였는데, 경제 상황 등 여러 문제로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군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소속된 부대는 일과 시간이 끝난 후 ‘개인 정비 시간’을 최대한 존중해주었고,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저는 개인 정비 시간과 ‘연등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학점은행제로 경영학사를 취득하였습니다(군 복무하며 받았던 월급을 여기에 모두 부었습니다;;). 위 경영학사를 준비한 결정적 계기는 자격증 취득이나 시험공부를 적극적으로 권유하던 부대 분위기에 편승했던 것으로, 사실 로스쿨 입시를 위해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훈련기간에 중간, 기말시험을 보지 못하는 등 학점이 낮았습니다).

3. 법률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
‘법률가’란 단순히 개인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정의와 형평’이라는 사회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와 형평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제가 속한 사회의 구체적인 여러 갈등과 분쟁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해결의 출발점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우리 사회가 지향할 올바른 방향과 기준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며 또래 친구들과 다르게 많은 사회적 경험을 겪었는데, 주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저는 양측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듣고, 무엇이 옳은지를 고민하며 당사자들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자주 제시하는 일종의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그로 인하여 보람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격이 한 당사자의 구체적인 삶을 대리하는 변호사의 자질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격 이외에도 꾸준히 사업 소득을 창출하여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고, 조직논리나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많이 추구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었습니다.

4. 전북대 로스쿨에 지원한 이유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객관적·외형적 스펙이 좋지 못했는데, 전북대의 경우 최종 학위의 학점에 잠시 적을 두었던 대학(서경대)의 학점을 추가적으로 반영해주었습니다(마치 편입 전 전적대 학점을 반영하는 것처럼). 또한 심층면접 비중이 높았던 점을 고려할 때 면접 준비를 잘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정성평가의 비중).
돌이켜 보건대, 제가 선발된 이유를 스스로 추측해보자면 ① 대학을 다닐 때 수석으로 학년을 수료했던 점(매 학기 전액 장학금 수령), ② 순발력 있게 면접에 대응한 점(면접 볼 때 위원님들께서 강하게 반응해주셔서 면접을 본 후 아쉬움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③ 나쁘지 않은 토익 성적 등(리트는 평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로스쿨 입시가 매우 치열해졌다고 하는데, 다시 본다면 붙을지 모르겠네요.

5. 치열하게 생활했던 로스쿨 생활
가. 공부를 열심히
로스쿨에 입학하였을 때, 대학 자퇴 후 5년 만에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왔던 것이라 감격스러웠습니다. 뽑아주신 면접위원님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로스쿨 재학 초기에는 학벌 좋으신 원우님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기에 더욱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점차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훌륭하신 원우님들을 보면서 겸손해졌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기본적으로 자유와 경쟁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듯합니다).

나. 실무수습을 적극적으로
개인적으로 실무실습의 기회는 ‘로스쿨 학생들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특권’이라 생각하고 재학 중 5번의 실무실습(경찰, 검찰 일반·심화, 법무법인 세종, 법제처)을 다녀왔습니다. 방학 중 실무실습을 하면 일선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업계의 내밀한 부분들까지 캐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진로를 구체화하며, 이후의 생활을 할 때 있어서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6. 재시 경험
초시를 나쁘지 않게 보았다고 생각하여 합격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환경법 과락으로 저는 3달 동안 지내던 사무실을 정리하게 됩니다(큰 절망감으로 국제법으로 선택과목을 바꾸었습니다). 로스쿨 합격 이후 순탄하게 흘러가던 제 인생은 다시 곤두박질쳤지만, ‘가난한 마음이 재기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버텼고, 결과적으로 재학생일 때보다 민사법 지식 등을 재정비하며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고 실무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7. 로스쿨 생활에 대한 아쉬웠던 점
재학생일 때는 변화하는 직업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탐색 없이 공직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검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형사 일변도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민사법·회사법을 응용하는 문제들이 매우 흥미진진하고, 학생일 때 좁은 시야로는 보이지 않던 다양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다시 로스쿨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조금 더 전문적인 분야나 다른 사업 루트를 심도 있게 알아볼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수기를 읽으시는 후배님들이 계시다면 “이제는 로스쿨 제도가 정착된 이상, 변호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변호사가 될 것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므로 여러 직역에 대한 진출을 염두에 두고 로스쿨 생활을 하시면 좋을 것 같다.”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8. 수기를 마치며
한변협의 수기 공고를 보고 공모전에 참가할지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굳이 재미없는 이야기로 지면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으로요.
혹시라도 학벌 등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후배님들이 계시다면,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진 의식(마인드)의 차이, 습관이나 태도의 차이 등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됩니다(학벌에 대한 가치를 낮추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사람들의 인생은 저마다의 시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 고등학교 때부터 일찍 자신의 적성을 찾아 부단히 노력하였을 것이고, 저처럼 대학을 진학 후에야(혹은 직장 생활을 하다가 늦게 로스쿨 입학하는 경우도 포함하여) 뒤늦게 머리가 트여(자신의 꿈에 도전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때부터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는 사람도 일부 있을 것입니다. 로스쿨 시대가 도래한 이상, 엘리트 법조인도 필요하지만 조금은 비정형적으로 공부를 한 법조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함).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